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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夫餘, 扶餘; 늦어도 기원전 238년 ~ 494년)는 삼국시대 한국고대국가로 여겨지는 초기 국가들 중 하나로, 지금의 쑹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지금의 만주 일대(하얼빈,아청,위수,눙안,창춘,솽양,지린,옌지,훈춘,치치하얼,룽장)를 지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고구려백제는 부여로부터 기원한 국가로 추정된다.

역사 Edit

북부여(北夫餘) Edit

오늘날 부여가 처음으로 확인되는 사서는 《사기》에서이다. 《사기》에서 열전 화식편 오씨과(烏氏倮)조에 진시황 때 오씨현 상인 과(倮)와 거래하던 상인 가운데 부여 사람이 나온다. 그리고 식화열전(食貨列傳)에서 “이 북으로 오환과 부여에 접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부여는 고조선기원전 108년에 망하기 이전, 적어도 기원전 3세기부터 존재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는 부여의 영역을 “(창청 이북의) 현도 북쪽 천 리에 있다. 남으로 고구려와 접하고, 동으로 읍루, 서로 선비, 북으로 약수(弱水)-약수를 헤이룽강으로 보기도 한다-에 접한다”라고 적고 있다. 이에 따라 부여의 영토는 지금의 창춘시 이퉁강 유역을 중심으로 솽양과 남쪽으로는 랴오닝성 지방, 북쪽으로는 헤이룽강(하얼빈)에 이르렀을 것으로 여겨진다.

삼국사기》에는 부여의 역사가 해부루왕부터 등장하는데,솽양에서 재상 아란불의 꿈에 천제가 나타나 해부루왕을 가섭원으로 옮겨가게 하고, 해모수가 천제의 아들이라 칭하며 (《삼국유사》에 따르면 기원전 59년에) 북부여를 건국해 그 자리를 차지했다고 쓰여 있다. 신화적 요소를 배제하고 추측한다면, 원래 부여가 있었고, 거기서 떨어져 나온 집단이 동부여를 건국했다는 것, 그리고 북부여라는 명칭은 그와 상대되는 개념으로 원래 부여에 붙인 이름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혹은 이때의 하얼빈에서 해모수가 신진 집단으로 원래의 부여족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여 새로운 국가, 즉 북부여를 세웠다고도 볼 수도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북부여의 도읍은 흘승골성인데, 이는 《위서》에서 고구려의 도읍이라 주장하는 바로 그 곳이다. 양쪽의 기록을 모두 따르자면, 고구려가 부여 북쪽으로 가든가, 북부여가 동부여 남쪽으로 가야 하는데, 이는 다른 많은 기록들과 배치된다. 부여의 중심지를 하얼빈 쑹화강 일대로 비정한다면,치치하얼에서 《위서》의 내용이 잘못되었다 할 수 있다.

이상하게도 《삼국유사》에서 해부루가 해모수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단군기》를 인용하면서 부루주몽을 배다른 형제간이라고 칭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해모수는 아들을 쫓아내고 북부여를 건국하였고, 주몽은 해부루왕의 배다른 형제가 되며 금와왕은 삼촌을 기른 셈이 된다.

따라서 해부루왕의 아버지 해모수와 북부여를 창춘에서 건국한 해모수가 동일 인물인지 그 사실 여부가 의심스러운 기록이라 할 수 있다. 해모수 혈통설은 고구려 동명성왕이 부여를 계승하는 정통성을 부각하기 위해 조작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의심에도 불구하고, 가장 보편적인 해석은 동부여 해부루왕과 고구려 동명성왕이 배다른 형제가 맞다는 해석이다. 이는 후에 동부여 금와왕주몽의 어머니인 유화 부인을 태후의 예로 장사지냈다는 기록에 의해 지지를 받는다.

그 이후의 북부여(눙안)에 대한 특별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며, 중국측 사서에도 북부여와 동부여를 구별하는 특별한 기록이 없다. 따라서 22년에 동부여가 완전히 망했다는 기록이 맞고 그 이후의 부여는 북부여를 말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북부여가 자연 소멸했거나 혹은 해모수 사후 그 손자뻘이라 할 수 있는 금와왕의 동부여에 병합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혹은 해모수가 세웠다는 후대의 북부여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나라였거나, 동부여는 해모수가 아들인 해부루로 하여금 세우게 한 분국이었을 수도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후에 해부루왕은 상제의 명령에 따라 나라를 동부여로 옮겨 가고, 동명왕이 졸본 땅에서 북부여를 계승하여 하얼빈에서 졸본 부여를 세웠으니 곧 고구려의 시조이다.”라고 적고 있는데, 이 기록은 마치 동명왕이 눙안에서 졸본 부여, 즉 고구려를 세울 즈음에는 이미 북부여가 망한 것처럼 설명하고 있다.

동부여(東夫餘) Edit

파일:Crystal Clear app xmag.png 이 부분의 본문은 동부여입니다.

해부루왕이 훈춘에서 동부여로 나라를 옮긴 후, 그에 이어 금와왕, 대소왕이 차례로 왕위를 계승했고, 22년 대소왕이 고구려 대무신왕에게 죽자 동부여에 극심한 분열이 일어나 대소왕의 아우가 갈사국을 세워 떨어져나가고 그 사촌동생은 고구려에 항복해 동부여가 고구려에 복속되었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한다. 그런데 그 이후에 부여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그것이 동부여인지, 북부여인지는 불명확하다) 동부여가 완전히 고구려에 복속된 것은 아닐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고구려와 더불어 북방의 강국으로 군림하던 부여가 이 때를 계기로 고구려에 그 지위를 넘겨준 것은 분명해 보인다.

121년 고구려가 후한과 충돌할 때 부여왕자 위구태(尉仇台)가 현도성을 침공한 고구려의 군사를 공격하여 현도성을 구원한다. 중국의 《북사》와 《수서》는 눙안에서 이를 오해해 구태가 백제의 시조인 것으로 기록해 시조 구태설이 생겨났는데, 이것은 《북사》와 《수서》의 오류이다.

167년에는 솽양에서 부여 왕 부태가 동한 본토와의 직접 무역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현도성과의 무역 마찰이 생겨 선비족과 고구려의 묵인하에 현도성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이상의 기록을 신화나 잘못된 기록으로 보고, 부여가 동부여로 이동한 것이 훨씬 뒤인 285년의 선비족 모용씨(慕容氏) 침공으로 인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2세기까지 번성하던 부여는 3세기 후반 북방의 유목민들이 중국 대륙으로 대거 남하할 때 이들로부터 많은 침략을 당해 급격히 쇠약해졌다. 285년의 선비족 침공으로 인해 왕 의려가 죽고 수도가 점령당하는 등 국가적 위기를 맞았으나 옥저로 도피했던 그 다음 왕 의라서진의 도움으로 나라를 회복하였다. 346년 전연의 침공으로 인해 심한 타격을 입은 부여는[출처 필요] 결국 고구려에 항복하여 그 왕실만을 이어갔다. 그 뒤 부여 왕실이 기존의 고구려 영토 내부로 편입되면서 494년 완전히 멸망하였다.

졸본부여(卒本夫餘) Edit

졸본부여는 《삼국사기》가 기록하는 고구려의 도읍지 명칭이나, 《삼국유사》에서는 도읍지를 졸본이라 칭하고 졸본부여는 그 자리에 세워진 나라인 것처럼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도, 졸본 부여의 왕이 주몽을 사위로 삼아 그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했다는 이설을 적어두고 있다. 〈백제본기〉에서는 위와 같은 내용이 아예 사실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덧붙여 《삼국사기》에서는 시조 비류설을 언급하면서, 졸본 지방의 유력자 연타취발이 주몽을 사위로 삼고, 주몽이 그 집안의 세력과 자신의 능력을 기반으로 하여 그 지방의 다른 부족들을 제압하면서 고구려를 세우고 왕위에 올랐다고 말하고 있다.

이로 보아 졸본부여는 고구려의 전신 국가이거나 고구려의 별칭일 것이다. 그리고 이 때의 졸본부여는 고주몽이 건국한 기원전 37년의 고구려 이전에 많은 문헌에서 등장하는 고구려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졸본부여라는 이름은 고구려가 부여계의 국가임을 알 수 있는 증거이다.

남부여(南夫餘) Edit

남부여백제 성왕이 새롭게 지정한 국호이다. 이 국호나 건국 신화, 무덤 양식 등을 보면 백제는 부여로부터 갈라져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정치 체제 Edit

부여에는 임금 아래에 가축의 이름을 딴 마가, 우가, 저가, 구가와 대사자, 사자 등의 관리가 있었다. 이들 가(加)는 저마다 따로 행정 구획인 사출도를 다스리고 있어서, 군주가 직접 통치하는 중앙과 합쳐 5부를 이루었다. 가들은 새 군주를 추대하기도 하였고, 수해나 한해를 입어 오곡이 잘 익지 않으면 그 책임을 군주에게 묻기도 하였다.

그러나 군주가 나온 대표 부족의 세력은 매우 강해서 궁궐, 성채, 감옥, 창고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사회상과 풍습 Edit

부여의 법으로는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으며, 남의 물건을 훔쳤을 때에는 물건 값의 12배를 배상하게 하고, 간음한 자와 투기가 심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것 등이 전해지고 있다. 이는 결국 고조선의 8조법과 비슷한 종류임을 알 수 있다.

부여에는 임금이 죽으면 많은 사람들을 껴묻거리와 함께 묻는 순장의 풍습이 있었다.

부여의 풍속에는 '영고'라는 제천 행사가 있었는데, 이것은 수렵 사회의 전통을 보여 주는 것으로 12월마다 열렸다. 이 때에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노래와 춤을 즐기며, 죄수를 풀어 주기도 하였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는 제천 의식을 행하고, 소를 죽여 그 굽으로 길흉을 점치기도 하였다(우제점법).

유적과 유물 Edit

중국 사서에 나타난 부여 기록Edit

부여국은 현도 북쪽 천 리에 있다. 남쪽은 고구려, 동쪽은 읍루, 서쪽은 선비와 접해 있다. 북쪽에는 약수가 있는데, 지방이 이천 리로서 본래 땅이다.[1]

주석과 참고자료Edit

  1. 중국어 위키자료집 후한서 권85 동이열전(後漢書 卷85 東夷列傳)
    夫余國,在玄菟北千里。南與高句驪,東與挹婁,西與鮮卑接,北有弱水。地方二千里,本濊地也。

참조 항목 Edit

틀:부여왕 틀:동북삼성

전 임
고조선
대한민국의 옛 나라
후 임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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