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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람(페르시아어: تمدن ایلام, 아랍어: حضارة عيلام)은 기록된 문명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 엘람의 중심지는 오늘날의 이란 서쪽 끝과 남서쪽(후제스탄(Khuzestan) 저지대와 일람 주(Ilam Province))과 이라크 남부에 있었다. 제국은 기원전 2700년경부터 기원전 539년까지 존재했다. 엘람 제국보다 앞서 존재했던 원시 엘람(Proto Elamite) 시대는 기원전 3200년경에 수사(뒤에 엘람의 수도가 되었다)가 동쪽에 있는 이란 고원의 문화에 영향을 주기 시작함으로써 비롯하였다.

고대 엘람은 수메르아카드(오늘날의 이라크)의 동쪽에 자리 잡았다. 고 엘람 시대에 이란 고원에 있는 여러 왕국을 포함하였으며 안샨에 중심지를 두었고, 기원전 제2천년기 중반부터는 후제스탄 저지대에 있는 수사에 중심지를 두었다. 그 문화는 페르시아 제국, 특히 엘람 제국을 계승한 아케메네스 왕조 시절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고, 엘람어는 공용어로 남겨졌다. 엘람 시대는 이란 고원이란 아제르바이잔만나이 왕국(Mannaeans kingdom)과 자볼샤르에 소흐타(Shahr-i Sokhta), “불타버린 도시”) 및 최근에 발견한 지로프트 문명과 같은 더 오래된 문명이 있음에도 이란 역사의 출발점으로 여겨진다. 엘람어는 이란어와 그다지 관련이 없으나, 크게 보아 두 언어는 모두 엘람드라비다어(Elamo-dravidian)에 속한다.

오늘날 이란의 주 가운데 하나인 “일람(Ilam)”의 이름이 “엘람”에서 유래하였다.

어원 Edit

엘람인은 그들의 나라를 “할타미”(후기 엘람어로는 “아타미”)라고 불렀고, 이웃하는 아카드인이 “엘람”으로 옮겼다. “엘람”의 뜻은 “높은 땅”이다. 게다가 히브리어 구약 성경에서 의 맏아들(성경 속의 엘람을 보라)이 엘람의 자손으로 불릴 때 할타미가 “엘람”으로 알려졌다. 엘람의 고지대는 그 저지대에 있는 후대의 수도 수사에 의해 더더욱 알려졌다.

프톨레미 이후의 지리학자는 “수시아나(Susiana)”라고 불렀다. 엘람 문명은 선사 시대에 이미 후대의 파르스 지역까지 확장해 나갔음에도, 처음에는 오늘날 후제스탄(Khuzestan)이라 불리는 지역에 중심지를 두었다. 실제로 오늘날 후제스탄 지역의 이름은 “엘람”을 뜻하는 옛 페르시아어 “후지이아(Hujiy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역사 Ed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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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람 역사에 대한 지식은 대부분 단편적으로 남아 있으며, 주로 메소포타미아의 근원에 기초를 둔 개축물이다. 도시 수사기원전 4000년경에 세워졌으며, 그 초기 역사 기간에 메소포타미아인에의 복속과 엘람인의 정복이 번갈아 바뀌었다.

가장 이른 시기의 평단면(1978년 르 브룅(Le Brun)이 지휘하여 발굴한 22~17면)에서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그에 해당하는 물건(동등물)이 없는 토기를 출토했다. 그러나 뒤이은 시기에 발굴물은 우루크기 수메르의 문화와 동일하다는 인정을 받았다. 페르시아 고원의 수사로부터 받은 원시 엘람의 영향은 기원전 3200년 무렵부터 점차 두드러졌고, 아직 판독하지 못한 원시 엘람문자 체계의 원문은 기원전 2700년 무렵부터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원시 엘람 시대는 아완 왕조의 건립과 함께 끝났다. 일찍이 알려진 엘람과 관련이 있는 역사적 인물로는, 수메르 왕 목록에 따르면 엘람에 정복당한 키시엔메바라게시(Enmebaragesi) 왕(기원전 2650년경?)이 있다. 그러나 엘람의 진정한 역사는 단지 2300년 무렵 이후에 아카드 제국에서 기원하는 날짜 기록으로부터 발자취를 찾을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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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람 문명은 카룬 강의 유역에서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동쪽으로 넓혀 갔다. 오늘날 엘람이라는 말은 후제스탄보다는 북쪽과 동쪽으로 펼쳐진 지역, 즉 저지대와 그에 바로 맞닿은 고지대를 합쳐서 이르는 지역을 일컫는다. 그러나 몇몇 엘람 유적은 이 지역 이외에 이란 고원 곳곳에 퍼진 채 발견된다. 이란에서 북쪽과 동쪽으로 더 먼 곳에도 남아 있는 엘람의 보기로는 이스파한 주시알크(타페흐 시알크, Tappeh Sialk) 유적과 게르만 주지로프트(Jiroft) 유적[1]이 있다. 엘람의 세력은 조화로운 정부 아래 그와 함께 그들의 여러 지역을 유지하기 위한, 다른 지역에만 유일하게 존재한 천연 자원을 최대한 상호 교환을 하게 만드는 능력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이것은 연합된 정부 구조를 통해 이루어졌다. 엘람의 역사는 전통적으로 2천년에 걸쳐 세 시기로 나눈다. 최초의 엘람 시대 이전은 원시 엘람 시대로 알려져 있다.

  • 원시 엘람 시대 : 기원전 3200년경 ~ 2700년경 (수사의 원시 엘람 문자)
  • 고 엘람 시대: 기원전 2700년경 ~ 1600년경 (기록된 최초 시기부터 에파르티(Eparti) 왕조까지)
  • 중 엘람 시대: 기원전 1500년경 ~ 1100년경 (안자나이트(Anzanite) 왕조에서 바빌론의 수사 침입까지)
  • 신 엘람 시대: 기원전 1100년경 ~ 539년 (기원전 539년 아케메네스 시대가 시작할 때까지. 이란인과 시리아인에게서 영향을 받은 특징이 나타난다.)

고 엘람 시대 Ed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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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古) 엘람 시대(초기 엘람 시대)는 기원전 2700년 무렵부터 시작한다. 역사 기록은 키시엔메바라게시(Enmebaragesi) 왕에 의한 엘람의 정복을 말한다. 이 기간에 세 개의 왕조가 통치하였다. 수사의 연대기에서부터 고 바빌로니아 시대까지의 목록으로부터 앞선 두 왕조에 각각 열 두 왕이 있었음을 우리는 안고 있다. 그 두 왕조는 아완(또는 “아반.” 기원전 2400년경 ~ 2100년경)과 시마시(Simash. 기원전 2100년경 ~ 1970년경)이다. 두 엘람 왕조는 짧은 기간 아완과 하마지(Hamazi)를 포함하여 매우 이른 시기에 수메르를 제어해 왔다고 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라가시(Lagash)의 에안나툼(Eannatum) 왕과 아다브(Adab)의 루갈안네문두(Lugal-anne-mundu) 왕 같은 강력한 여러 수메르 통치자는 일시적으로 엘람을 지배했다고 기록되었다.

아완 왕조는 부분적으로 사르곤 왕과 동시대에 존재했다. 사르곤은 아완의 루히이샨(Luhi-ishan) 왕을 무찌르고 수사를 복종시켰을 뿐만 아니라 아카드어를 공용어로 만들려고 하기도 했다. 그때부터 메소포타미아인이 이란 고원에서 자원(예를 들면 나무, 돌, 광물)에 관심을 가지고 개발하기까지 엘람에 대한 메소포타미아의 근원은 더 많아졌고, 그리고 군사적 원정을 하는 일은 더욱 일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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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르곤의 증손자, 샤르칼리샤리(Shar-kali-sharri) 치세에 아카드가 붕괴함과 동시에 엘람은 아완의 마지막 왕, 쿠티크인슈시나크(Kutik-Inshushinak)(기원전 2240년경 ~ 2220년경) 치세에 독립을 선언했다. 그리고 아카드어를 떨쳐버리는 대신에 간결한 엘람 선형 문자(Linear Elamite)로 필기하도록 장려하였다.

쿠틱인슈시낙 왕이 수사와 안샨(Anshan)을 정복하였고 정치적 통합을 다소 이루었다고 보인다. 그의 치세 다음에 구티족이 엘람을 일시적으로 침략하여 황폐화하던 때에 아완 왕조는 무너졌다.

약 1세기 뒤에, 우르슐기(Shulgi) 왕은 도시 수사와 그를 둘러싼 지역을 탈환했다. 시마시크(Simashk) 제1왕조 치세에 엘람은 평화의 기간과 외교적 접근을 엇매끼며 간헐적인 메소포타미아인과 구티족의 공격을 받았다. 예를 들면 우르의 슈신 왕은 그의 딸 가운데 한 사람을 안샨의 왕자에게 시집을 보내었다. 그렇지만 수메르인의 힘은 약했다. 이비신 왕은 기원전 21세기에 일어난 엘람의 침입을 막지 못했다. 그리고 기원전 2004년에 엘람 제국은 수사의 사람들과 동맹을 맺었고, 그때 엘람 제국을 다스린 킨닷투(Kindattu)는 시마시크의 제6대 왕이며, 그는 우르를 점령하여 복종시켰고 이비신을 사로잡았다. 그렇게 우르 제3왕조는 끝을 맺었다. 그러나 우르의 계승국(successor state)인 이신의 여러 왕은 엘람 제국을 우르의 바깥으로 몰아내고 도시를 재건했으며, 알람 제국에게 약탈 당한 난나(Nanna)의 나라를 다시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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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왕조인 에파르티 왕조(기원전 1970년경~1770년경)는 그 구성원이 가진 이름 때문에 “수칼마흐(sukkalmah)의”라고 알려졌으며, 메소포타미아에서 고(古) 바빌론 시기와 동시대였다. 이 기간은 혼란스럽고 재구성하기 힘들다. 에파르티 1세가 그 기초를 닦았음이 확실하다. 이 기간에, 수사는 엘람의 통치를 받았다. 그러나 라르사(Larsa)와 같은 메소포타미아인의 나라들은 끊임없이 그 도시를 되찾으려고 시도하였다. 기원전 1850년 무렵 수사 북쪽 다른 엘람인 나라의 왕인 쿠두르마부그(Kudur-mabug)는 그의 아들 와라드신(Warad-Sin)을 라르사의 옥좌에 앉혔고, 와라드신의 형제인 림신(Rim-Sin)은 그것을 계승하였으며 메소포타미아의 라르사 부근 여러 곳을 정복했다.

이 시기의 엘람에서 에파르티 왕조의 유명한 통치자는 시루크두흐(Sirukdukh, 기원전 1850년경), 시웨팔라르쿠파크(Siwe-Palar-Khuppak), 쿠두르나훈테(Kudur-Nahhunte)이다. 시루크두흐는 바빌론의 신진 세력을 포함하는 다양한 군사적 연합을 하였고, 이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사람이었던 시웨팔라르쿠파크는 마리지므릴림(Zimrilim)이나 심지어 바빌론함무라비와 같은 메소포타미아 왕에게서 “아버지”라고 공손히 불리었으며, 쿠두르나훈테는 아카드의 사원을 약탈했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에서 엘람의 영향력은 오래 가지 못했다. 기원전 1760년 무렵 함무라비는 엘람을 몰아냈으며, 라르사의 림신을 무너뜨렸고, 메소포타미아에서 바빌론의 지배를 확립했다.

바빌론의 카사이트 통치기(기원전 1595년 무렵)에 대한 드문드문 알려진 전거(典據) 말고는 이 왕조의 후반부에 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중 엘람 시대 Edit

중(中) 엘람 시대(중기 엘람 시대)는 기원전 1500년경 안샨 왕조의 흥성과 함께 시작하였다. 안샨 왕조의 통치는 수사의 “엘람화(Elamisation)”라는 특징을 보였고, 왕들은 “안샨과 수사의 임금”이란 칭호로 불렸다. 이들 왕조의 초기에, 키디누에스(Kidinuid)족은 때때로 비문(碑文)을 비롯한 기록에 여전히 아카드어를 사용하였고, 그들을 계승한 이기할케스(Igihalkid)족과 슈트루케스(Shutrukid)족은 엘람어를 점차 사용했다. 또한 엘람어와 문화는 점차 수시아나에서 중요한 위치를 지니게 되었다.

키디누이드족(기원전 1500년경~1400년경)은 서로 관계가 미심쩍은 다섯 통치자의 집단이다. 그들은 그들이 써왔던 더 오래된 칭호인 “수사와 안샨의 임금”과 그들 스스로 불렀던 “키르와시르(Kirwashir)의 종복”을 동일하게 여겨졌다. 키르와시르는 엘람의 신으로 수시아나 고지대에 있는 만신전(萬神殿)에 모셔진 신이다.

이기할키드(기원전 1400년경~1210년경)족은 10명의 통치자가 알려져 있으며, 어쩌면 더 많을는지도 모른다.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카사이트의 공주와 결혼했다. 카시테의 왕 쿠리갈주(Kurigalzu) 2세는 기원전 1320년 무렵에 일시적으로 엘람을 점령했다. 그리고 나중에 기원전 1230년 무렵에는 또다른 카시테의 왕 카시틸리아스 4세(Kaštiliaš IV, Kashtiliash IV)가 엘람과 싸웠으나 엘람을 점령하지는 못했다. 엘람의 키딘후트란(Kiddin-Khutran) 1세는 기원전 1224년에 엔릴나딘슈미(Enlil-nadin-shumi)를, 기원전 1227년에서 1217년 사이에 아다드슈마이디나(Adad-shuma-iddina)를 격퇴함으로써 카시테족을 되쫓아버렸다. 이기할키드 치세에 아카드어 비문과 기록은 드물게 되었다. 그리고 엘람 고지대의 신들은 점점 더 수사 사람도 국교(國敎)처럼 확실하게 믿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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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트루키드 치세(기원전 1210년경~1100년경)에, 엘람 제국은 전성기를 맞이했다. 슈트루크나훈테(Shutruk-Nakhkhunte)와 그 세 아들, 쿠티르나훈테 2세(Kutir-Nakhkhunte II)를 비롯한 실하크인슈시나크(Shilhak-In-Shushinak)와 후텔루테시인슈시나크(Khutelutush-In-Shushinak)는 메소포타미아의 카시테로 자주 출정할 만큼 유능했으며, 동시에 수사와 그 제국 전역에서 호화로운 사원을 짓거나 있던 사원을 복원하는 등 왕성한 건설 활동을 벌였다. 슈트루크나훈테는 아카드와 바빌론, 에슈눈나(Eshnunna)를 급습했고, 수사에서 마르두크마니시투슈(Manishtushu)의 성상(聖像)을 비롯한 함무라비 법전, 나람신 전승비와 같은 전리품을 그들의 나라로 가져갔다.

기원전 1158년, 슈트루크나흐훈테는 카시테족을 영원히 지워버렸고, 바빌론의 카시테 왕 자바바슈마이디나(Zababa-shuma-iddina)를 죽인 뒤 자신의 맏아들 쿠티르나훈테를 왕위에 앉혔다. 쿠티르나훈테는 겨우 3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

쿠티르나훈테의 아들 후텔루테시인슈시나크(Khutelutush-In-Shushinak)는 아마도 쿠티르나훈테와 그의 딸 나훈테우투(Nakhkhunte-utu) 사이에서 근친상간으로 태어났으리라 여겨진다. 그의 치세는 결국 마르두크 상을 되찾아간 바빌론의 왕 네부카드네자르 1세(Nebuchadnezzar I)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수사를 일시적으로 양보하게 됨으로써 끝맺었다. 후텔루테시인슈시나크는 안샨으로 달아났으나 나중에 수사로 돌아왔고, 그의 형제 실하나함루라가마르(Shilhana-Hamru-Lagamar)는 아마도 슈트루키드 왕조의 마지막 왕으로서 그를 계승하게 되었으리라 여겨진다. 후텔루테시인슈시나크 이후 엘람 제국의 힘은 점차 쇠약해졌고, 3세기 넘게 존재하던 엘람 제국은 모호하게 사라져 버린다.

신 엘람 시대 Edit

신 엘람 1기 (기원전 1100년경~770년경) Edit

신(新) 엘람 1기(후기 엘람 1기)에 대해 알려진 바는 매우 적다. 안샨은 여전히 적어도 일부는 엘람에 속했다. 아시리아에 대항하여 맺은 엘람과 바빌로니아의 동맹이 나타나 있다. 바빌로니아의 왕 마르비티아플라우슈르(Mar-biti-apla-ushur, 기원전 984년~979년)는 엘람에서 태어났다. 엘람 제국은 바빌로니아의 왕 마르두크발랏수이크비(Marduk-balassu-iqbi)와 함께 아시리아 왕 샴시-아닷 5세기원전 823년~811년)의 공격에 대항하여 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 엘람 2기 (기원전 770년경~646년) Ed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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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엘람 2기(신 엘람 후기)는 이란인이 이란 고원으로 옮겨간 대이주로 특징지어진다. 기원전 800년 무렵에 시작한 아시리아의 근원은 “강한 메디아인” 곧 활동적인 메디아인이고, 그들을 가리키는 적당한 이름(파르티아인, 사가르티아인(Sagartian), 마르지아인(Margian), 박트리아인, 소그디아나인 들)으로 뒷날 역사에 등장하는 “멀리 떨어진 메디아인”이기도 하다. 이렇게 압박하는 부족 가운데 하나가 파르수(Parsu)이다. 파르수는 기원전 844년에 처음 기록에 보이는데, 우르미아 호 남동쪽 바닷가에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파르수는 이 시기의 끝에 엘람인의 원래 살던 곳인 이란 고원의 이름이 페르시아 본래의 이름으로 바뀌는 원인이 되다.

더 자세한 사항은 기원전 8세기 말에 아시리아에 맞서 바빌로니아의 독립을 지키려고 엘람인이 메로다크발라단(Merodach-Baladan)과 동맹을 맺었을 때로 알려져 있다. 훔바니가시(Khumbanigash, 기원전 743~717년)는 사르곤 2세에 대항하여 메로다크발라단을 지원했고, 그의 후계자 슈트루크나흐훈테 2세(기원전 716~699년)가 기원전 710년에 사르곤의 군대로 말미암아 원정의 방향을 바꾸는 동안에는, 언뜻 보기에는 유한한 성공이었다. 그리고 사르곤의 군대에 의해 격파된 다른 엘람인은 기원전 708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바빌론에 대한 아시리아의 승리는 메로다크발라단을 다시 퇴위시킨 사르곤의 아들 센나케리브(Sennacherib) 대에 이르러 이루어졌다. 마침내 센나케리브는 자신의 아들 아슈르나딘슈미(Ashur-nadin-shumi)을 바빌로니아의 왕위에 앉혔다.

슈티르나흐훈테(Shuttir-Nakhkhunte)는 기원전 694년에 아슈르나딘슈미(Ashur-nadin-shumi)과 바빌론에 붙잡혀 조종당하다가 그의 형제 칼루슈(Khallushu)에게 살해되었다. 그리고 다음에는 칼루슈가 쿠티르나흐훈테에 의해 암살되었다. 그를 계승한 자는 그러나 이윽고 훔마메나누 3세(Khumma-Menanu III, 기원전 692~689년)에게 양위하였다. 훔마메나누는 기원전 691년에 바빌로니아인을 도와 할룰레 전투에서 아시리아에 대항하려고 새로 병사를 모았다. 이 전투는 분명하지 않거나, 또는 적어도 양측이 그들의 연대기에서 서로 승리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겨우 2년 뒤에 센나케리브(Sennacherib)가 바빌론을 파괴해 버렸다.

훔마할다시 1세(기원전 688~681년)와 훔마 할다시 2세(기원전 680~675년) 치세에는 엘람바빌론 관계가 악화되는 징조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들 두 나라는 시파르(Sippar)를 급습한다. 에사르하돈(Esarhaddon)의 치세 초기(기원전 681~669년) 아시리아에서는 바빌로니아 남부의 민족적인 엘람의 통치자인 나부제르키티리스이르(Nabu-zer-kitti-lišir)가 반란을 일으켜 우르를 포위하였다가 엘람으로 달아났다. ABC 1(Assyrian and Babylonian Chronicles I) 제3열 제39~42행에는 “엘람의 왕이 그를 죄수로 대했고 그를 잡아 죽였다.”라고 적혀 있다.

우르타쿠(Urtaku, 기원전 674~664년) 치세에 잠깐, 굶주리는 수시아나에 밀을 보낸 아슈르바니팔(Assurbanipal, 기원전 668~627년)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사이좋은 관계는 그저 잠시였고, 다른 엘람인은 메소포타미아를 공격하는 사이에 우르타쿠가 죽었다.

그의 계승자인 템프티훔마인슈시나크(Tempti-Khumma-In-Shushinak, 기원전 664~653년)는 아슈르바니팔에게 역습을 받았고, 기원전 653년에 울라이(Ulaï) 전투에서 죽었다. 그리고 아시리아는 수사(Susa)를 점령했다. 그해에 메디아 주의 북부가 스키타이족에게 넘어갔으며, 같은 해에 그들의 왕 테이스페스는 안샨을 손에 넣었고, 그들은 안샨에 파르슈(Parsu)족을 대신하여 들어섰다. 마지막 세 왕은 별문제로 하고, 엘람의 왕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샨과 수사의 임금”이라고 스스로 칭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아슈르바니팔과 그의 형제 샤마시슘우킨 사이에 벌어진 내전으로 말미암아 휴식이 주어지는 잠깐 동안 엘람은 그들끼리 엘람 왕국을 약화시키는 싸움에 빠져 들었고, 그로 말미암아 기원전 646년에 아슈르바니팔이 수시아나를 쉽게 유린하고 수사를 얻었다. 기원전 651년부터 640년 사이에 엘람에서는 그들의 왕이 아시리아에 잡혀가는 일과 찬탈 때문에 재위가 짧은 시기가 이어졌다. 이런 식으로 엘람의 마지막 왕 훔마칼다쉬 3세(Khumma-Khaldash III)는 기원전 640년에 그의 나라를 유린한 아슈르바니팔에게 붙잡혔다.

헨리 오스틴 레어드(Henry Austin Layard)가 1854년에 발굴한 문자판에는 아슈르바니팔이 그가 행한 파괴를 자랑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수사, 훌륭하고 성스러운 도시, 그들이 신들이 머무는 성소, 그들의 신비가 머무는 곳, 나는 정복했다. 나는 이 궁궐에 들어갔고, 나는 금은보화를 넣어둔 그들의 보물창고를 열었다. … 나는 수사의 지구라트를 부수었다. 나는 이 빛나는 구리 뿔피리를 깨뜨렸다. 나는 엘람의 사원을 파멸로 몰아 넣었다. 그들의 신들과 여신들을 나는 바람에 날려버렸다. 그들의 조상과 옛 왕의 무덤을 나는 짓밟았고, 나는 (무덤에) 햇빛이 들게 하였으며, 그리고 나는 그들의 뼈를 꺼내어 아슈르의 영토로 옮겨갔다. 나는 엘람의 영토를 짓밟았고, 그들의 땅에 나는 소금을 뿌렸다.”[2]

신 엘람 3기 (기원전 646년~539년) Edit

황폐함은 아슈르바니팔이 자랑한 만큼 완전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엘람의 지배는 훔마할다시 3세의 아들 슈티르나흐훈테(기원전 6세기 전반의 대단찮은 왕, 인다다(Indada)의 아들, 슈티르나흐훈테와 자주 헛갈린다.) 이후에 빠르게 회복되었다. 아케메네스 이전 마지막 세기에 엘람 왕국은 서로 다른 작은 왕국으로 산산이 나뉘었다. 기원전 7세기 말 세 명의 왕(슈티르나흐훈테 및 할루투시인슈시나크(Khallutush-In-Shushinak), 앗타훔마인슈시나크(Atta-Khumma-In-Shushinak))은 모두, 아케메네스 제국이 이미 안샨을 통치하던 때에도, 여전히 스스로를 “안잔(안샨)과 수사의 임금” 또는 “안잔(안샨)과 수사의 왕국을 확장한 자”라고 불렀다. 그들의 후계자 훔마메나누(Khumma-Menanu)와 실하크인슈시나크 2세(Shilhak-In-Shushinak II)는 “임금”이라는 간단한 칭호를 가졌으며, 마지막 왕 템프티훔마인슈시나크(Tempti-Khumma-In-Shushinak)는 내세울 어떤 칭호도 갖지 못했다. 기원전 539년, 아케메네스 제국은 수사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엘람의 종교 Edit

파일:Two horned elam.jpg

이 시기의 종교를 보자면, 엘람인은 우상 숭배다신 숭배를 하곤 했다. 그들의 초기 만신전(pantheon)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키리리샤(Kiririsha)라고 불린 여신이다. 서로 같은 기원을 가진 그 이름은 종교를 통해 서로 다른 사람들의 신앙 체계에서 발견된다.

엘람의 언어 Edit

파일:Crystal Clear app xmag.png 이 부분의 본문은 엘람의 언어입니다.

엘람어는 인접 셈어족, 수메르어 그리고 이란의 인도유럽어족과 관련이 없다. 그것은 아카드 문자에서 적응된 설형문자로 기록되었지만 최고 오래된 문서는 훨씬 다른 선형 엘람문자이다.

엘람의 유산 Edit

아시리아인은 그들이 완전히 엘람을 파괴하였다고 생각했지만 아시리아의 권력이 흐려진 후에 새로운 정책이 엘람지역 에 떠올랐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더오래된 엘람 제국의 권력을 다시 실습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카룬강의 물줄기와 약간 너머까지를 지배하였다. 아시리아의 쇠퇴로 수혜를 받은 민족들중에는 페르시아 인이 있는데 그들은 엘람북쪽의 우르미아 호 근처에 살았다는 것이 기원전 9세기의 아시리아 문서에 검증된다. 약간 후 기원전 653년에 그 영역은 스키타이의 마디우스에게 함락되었는데 기원전 7세기 중반에 아케메네스의 왕자 테이스페스가 엘람의 안샨을 정복하여 페르시아 제국으로 팽창할 핵심을 형성하였다.

엘람이 아케메네스 제국에 미친 영향 Edit

기원전 6세기경에 에케메네스왕조의 부상은 엘람이 독립적인 정치 권력으로서의 존재에 종결을 가져다 주었지만 엘람 토착의 전통인 문화적 개체로서는 아니였다. 키루스 대왕에의한 안샨왕의 직책, 캄비세스 1세에의해 짜여지고 파사르가대의 유명한 날개달린 지니위에 보이는 엘람 관복 등등 이 페르시아 이란의 새롭게 떠오르는 아케메네스 문화 의 필수적인 부분을 담당하였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더더욱 진행하여서 이란의 엘람과 후세의 왕조들간의 문화적 계속성의 분명한 고리를 성취하였다. 그리하여 엘람이 새로운 제국에 흡수되었을 뿐만아니라 이란의 수천년된 황실의 유산의 부분이 되었다 그러나 엘람 문명은 이데 페르시아의 최고 오래된 문명으로 인식된다.

아케메네스 제국 이후에 미친 영향 Edit

전통적이 역사는 아케메네스내에 합병과 함께 엘람 역사를 종결하였다. 그러나 그리이스와 라틴의 문헌은 엘리마이스는 문화적으로 생존하였다고 고증한다.

엘람 연구 Edit

2001년 바세로 기안 피에트로는 다음과 같은 언급하였다.

오늘날에도 그 언어가 우리의 언어 체계와 과거의 교육에 근본적인 역할을 하는 한편, 이 걸음마 아기는 우리에게 대학 주제의 경계가 얼마나 허무한지를 보여준다.고대의 엘람인들은 아시리아와 싸웠으며 페르시아인들에 반란하는 한편 아시리아와 이란의 연구에 굳게 제한되어있었다.고대 엘람이 메소포타미아 저지대와 이란 고지대사이의 회합 장소로 역할을 하여 엘람 연구는 아시리아와 이란에서 다양한 분야의 작업을 통해 자료를 얻을 필요가 있다.
불행히도 독립적인 대학 주제가 없어서 우리는 엘람 연구의 규정된 교육이 거의 없다. 우리가 고대 아샨과 수시아나를 언급하면서 그의 외국의 표기를 채용하므로 엘람 학자들은 그 대학 기반이 아시리아 학자,이란 학자 또는 언어학자인 경우가 많다. 즉, 그들은 후시대 또는 외래의 관점으로 접근하고 있다.


함께 보기 Edit

외부 고리 Edit

주석 Edit

  1. Cultural Heritage News Agency (2005년 2월 1일). Elamite Inscription Found on 5000-Year-old Jiroft Brick (영어) (HTML). 2007년 5월 24일에 확인.
  2. Persians: Masters of Empire, Time-Life Books, Alexandria, pp.7~8, VA (1995) ISBN 0-8094-9104-4

참고 자료 Ed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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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Quintana Cifuentes, E., Historia de Elam el vecino mesopotámico, Murcia, 1997. Estudios Orientales. IPOA-Murcia.
  • QUINTANA CIFUENTES, E., Textos y Fuentes para el estudio del Elam, Murcia, 2000.Estudios Orientales. IPOA-Murcia.
  • Khačikjan, Margaret: The Elamite Language, Documenta Asiana IV, Consiglio Nazionale delle Ricerche Istituto per gli Studi Micenei ed Egeo-Anatolici, 1998 ISBN 88-87345-01-5
  • Potts, Daniel T.: The Archaeology of Elam: Formation and Transformation of an Ancient Iranian Stat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9) ISBN 0-521-56496-4 and ISBN 0-521-56358-5
  • McAlpin, David W., Proto Elamo Dravidian: The Evidence and Its Implications, American Philosophy Society (1981) ISBN 0-87169-713-0

틀:아케메네스의 행정 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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